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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고이는 이야기

Kierkegaard - 罪 -

by 심홉 2008. 6. 26.

 정신 생활에 있어서 정지 상태라는 것은 없다. 대체 상태라는 것이 없다. 거기서는 일체가 활동이다. 그래서 인간이 옳은 것을 인식한 바로 그 순간에 그것을 실천하지 않으면 우선 먼저 인식이 그 비등하기를 멈춘다. 다음 문제는 의지가 인식한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있다. 의지는 변증법적인 어떤 것이며, 인간의 저급한 성질까지도 모두 그 속에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인식된 것이 이 저급한 성질이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당장 의지가 발동하여 인식이 이해한 것의 반대 행위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한 강한 대립이 일어난다 해도 아마 극히 드물게 일어날 것이다.) 오히려 의지는 잠시 그대로 버려둘 것이다. 이리하여 잠정 기간이 발생한다. 그리고 "자, 내일까지 형편을 두고 보기로 하지."하게 된다. 그 사이에 인식은 점차 흐려지고 저급한 부분이 점점 강해진다. 그것은 실제로 선(善)은 그것이 인식된 순간에 실행되어야 하는 것이지만(그래서 순수한 관념성에서는 사유로부터 존재로의 이행이 그렇게 쉽게 되는 것이다. 거기서는 모든 것이 당장 일어난다.) 저급한 부분의 강함은 그것을 연장시키는 점에 있기 때문이다. 그 사이에 의지는 별로 그것에 반대하는 것도 아니고, 말하자면 멍청히 그것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인식이 적당하게 흐려진 뒤가 되면 인식과 의지는 서로 전보다 잘 이해할 수 있다. 최후에는 양자가 완전히 공명한다. 왜냐하면 이제 인식은 의지쪽으로 이행하여 의지가 원하는 대로 하는 것이 아주 옳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인간은 이렇게 살고 있다. 그들의 윤리적이고 종교적인 인식이 그들 속에 있는, 저급한 성질이 원하지 않는 그런 결단과 귀결 속으로 그들을 끌어내리려고 하기 때문에 그들은 서서히 인식을 흐리게 하는 데 노력하는 것이다. 그 대신에 그들은 그들의 심미적인 형이상학적 인식을 확대한다. 이런 인식은 윤리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기분 전환에 불과하다.





 죄란 인간이 옳은 일을 이해하지 못 했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것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 것, 그것을 원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격언도 있다.

 "죄를 저지르는 것은 인간적이지만 죄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악마적이다."  물론 이것은 그리스도교적으로는 좀 다른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다만 새로운 죄만을 보고 그 중간에, 개개의 죄 사이에 있는 것을 간과하는 단순히 비연속적인 고찰방법은, 마치 기차는 기관차가 폭폭 증기를 내 뿜을 때만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천박하다.


 아니다. 우리가 본래 주목해야 할 점은, 기관차가 증기를 내뿜었으니까 전진하는 것이 아니라 기관차가 움직이는 평균 운동으로써 그렇게 중기를 내뿜는 것이다. 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죄 속에 머물러 있는 상태가 최악의 죄이다. 개개의 죄는 죄의 계속이 아니라 죄의 계속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개개의 새로운 죄 속에서는 죄의 운동이 쉽게 감각적으로 지각될 뿐이다.


 죄 속에 머물러 있는 상태는 개개의 죄보다 더욱 나쁜 죄다. 그것은 죄 자체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죄 속에 머물러 있는 상태가 죄의 계속으며, 새로운 죄라는 것은 진실이다. 보통 사람들은 이것을 다르게 이해하고 있다. 즉, 사람들은 그런 경우가 하나의 죄가 새로운 죄를 낳는다고 하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훨씬 깊은 근거가 있다. 죄 속에 머물러 있는 상태가 새로운 죄라는 사실이다.





Kierkegaa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