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마음에 고이는 이야기

by 심홉 2012. 2. 15.




그녀는 결혼 전이나 후나 나의 아버지라는 사람을 잘 몰랐고, 때로는 이 낯선 사나이가 왜 하필이면 자기의 품 안에서 죽으려고 온 것인지 기구하게 생각하기도 했다.
19p

'무엇이든 벌충할 수 없는 것은 없다. 그리고 따지고 보면 모든 것에 어떠한 변화도 있을 수 없다. 표면적인 소동 따위는 아무 뜻도 없으니, 그런 것 때문에 우리의 운명을 이루고 있는 죽음과 같은 고요를 잊어서는 안된다.'
57
 

며칠 전에 식당에서 주인의 일곱 살짜리 아들이 회계 보는 여자에게 이렇게 외치는 소리를 들은 일이 있다. "아버지가 없을 땐 내가 주인이야!" 바로 이게 사내라는 것이다!
이 세상의 재물은 그 소유자에게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보여준다. 반대로 내게는 그것이 내가 어떤 사람이 아닌가를 가리켜 보였다.
97p

비참한 형편 속에서 사는 어린애는 제 존재에 대해서 자문하는 일이 없다. 빈곤이나 질병으로 말미암아 육체적으로 들볶이면, 그의 정당화될 수 없는 상태가 그의 존재를 정당화해 주기 때문이다. 굶주림과 끊임없는 죽음의 위협 자체가 그가 생존할 권리의 근거가 된다. 그는 죽지 않기 위해서 사는 것이다.
98p

오직 시모노 씨가 없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그의 이름을 입 밖에 내기가 무섭게 이 빽빽한 방 안에 칼로 도려낸 듯이 빈자리가 파였다. 한 인간이 이미 마려된 제자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의 자리, 그곳은 만인의 기다림으로 하여 깊숙이 파인 허공이며, 육신이 갑자기 다시 태어날 듯한 보이지 않는 자궁이다.

한데 순수한 부정적 본질로 환원된 이 순결 무구한 사람은 다이아몬드처럼 더 이상 압축될 수 없는 투명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나로 말하자면, 지상의 어느 한정된 곳에서 시시각각으로 어떤 사람들 틈에 끼어 있고 거기서 자기의 존재가 군더더기임을 느끼는 것이 내 운명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내가 마치 물처럼, 빵처럼, 공기처럼,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다른 모든 곳에서 아쉬운 존재가 되기를 바란 것이다.
101p

나는 동그랗게 말린 내 머리칼이 목에 두른 흰 수건 위를 굴러 야릇하게 윤기를 잃고 마룻바닥에 떨어지는 것을 정겹게 내려다 보았다. 나는 짧은 머리로 의기양양하게 돌아왔다.
 모두들 소리를 질렀을 뿐 나를 껴안아 주지도 않았다. 어머니는 자기 방으로 물러가더니 울기만 했다. 귀여운 딸을 사내애와 바꿔치기 당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보다 더 딱한 일이 생겼다. 길게 말린 나의 아름다운 머리칼이 귓전에서 펄럭거릴는 동안은 어머니는 내가 못생겼다는 자명한 사실을 부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 오른쪽 눈은 벌써 뿌예지고 있는 판이었다. 어머니도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할아버지 자신도 어쩔 바를 모르는 것 같았다. 귀여운 보물을 맡았는데 두꺼비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115p

동네의 영화관들이 아무나 마구 입장시켜서 불편하긴 했지만, 나는 그 속에서 이 새로운 예술이 모든 사람의 것이자 동시에 내 것임을 알았다. 우리는 정신 연령이 같았다. 나는 일곱 살이지만 읽을 줄을 알았고, 영화는 열두 살이지만 아직 말할 줄을 몰랐다. 그것은 이제 시작이어서 앞으로 많은 진보를 하게 될 것이라고들 했다. 나는 우리가 같이 자라리라고 생각했으며, 그 후에도 우리의 공통의 유년기를 잊지 않았다. 
133p

나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기쁨에 홀려 들었다. 무엇보다도 주인공들이 불치의 벙어리라서 좋았다. 아니다. 그들은 제 의사를 전할 수 있었으니 벙어리라고는 할 수 없었다. 우리는 음악으로 의사소통을 했고, 그것은 바로 그들의 내면의 소리였다. 학대받는 무고한 사람은 제 고통을 말하거나 보이는 것 이상으로 절실한 느낌을 주며, 그에게서 울려 나오는 멜로디로써 그 고통을 내 속에 스며들게 했다. 나는 그들의 대화를 읽었지만 그들의 희망과 실망의 소리는 귀로 들려왔고, 그들이 입 밖에 내지 않는 의연한 괴로움을 내 귀로 포착할 수 있었다. 나는 그 속에  끌려 들어갔다. 스크린에서 울고 있는 그 젊은 과부는 내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 여자와 나는 단 하나의 영혼을 함께 나누어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쇼팽의 '장송행진곡'이었다. 그녀의 눈물이 내 눈을 적기시에는 그 이상이 필요하지 않았다. 
134p

나는 한없이 흐뭇했다. 내가 살고 싶은 세계를 발견했고, 절대의 경지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등이 다시 켜졌을 때의 불안은 또 어떠했던가! 그 등장인물들에 대한 사랑으로 가슴이 터질 듯했는데, 그들은 그들의 세계와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나는 그들의 승리를 내 골수에 사무치도록 느꼈지만, 그것은 다만 그들의 승리였고 내 것은 아니었다. 거리로 나서자 나는 내가 여분의 존재라는 것을 다시 느껴야 했다.
135p

어떤 기대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특별히 이 세상에 나타난 것이 아닌 이상, 사람이 태어난다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라는 느낌이 가시지 않았다. 그 무렵 나는 대단한 자존심과 고독감을 함께 지니고 있어서 온세상이 기다리는 사람이 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죽어 버리겠다는 생각을 품었던 것이다.
178p

할아버지가 보증해 준 것으로 믿었던 그 재주가 단순히 우연이라고 생각하기는 싫었다. 나는 그것이 하나의 사명이라고 치부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나를 밀어주는 사람도, 나를 진실로 필요로 하는 사람도 없어서 그런 사명을 나 스스로 꾸며 냈다는 것을 잊을 수 없었다. 노아의 홍수 이전의 세계로부터 불쑥 출현하여, 남들의 눈에 그렇게 보이기를 바라는 그런 '타자로서의 나가 되기 위하여 '자연'의 상태에서 벗어나려는 순간, 나는 내 '운명'을 마주 보았고 똑바로 인식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내 '자유'였다. 나는 내 자유를 마치 외적인 힘처럼 내 앞에 우뚝 세워 놓았던 것이다. 요컨대 나는 이제 나 자신을 완전히 속일 수도 없었고 미몽에서 완전히 깨어날 수도 없었다.
* "노아의 홍수 이전의 세계"와 "자연의 상태"에 관한 언급은 인간이 원래부터 이유 없이 이 세상에 내던져진 우연적 존재임을 의미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이런 필연성 없는 존재임을 의식할 때 자기자신을 주체적으로 창조해 나가는 대신, 흔히 남들의 눈을 통해서 마치 필연적인 존재인 것처럼 단단히 정립하기를 바란다. 어린 사르트르의 경우를 보자면 그는 작가가 되어 만인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 자기 운명이라고 스스로 타이르지만, 그것은 자기기만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운명'은 우리의 원초적인 '자유'가 존재의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만들어 낸 진정치 못한 수작이기 때문이다.
 184p

그러나 불안은 그 모습을 바꾸고 줄곧 뒤따라 다녔다. 재능을 더욱 갈고 닦는 것은 좋다. 그러나 무엇에 써먹자는 것인가 숱한 사람이 나를 필요로 한다는 것도 알겠다. 그러나 무엇을 하기 위해서인가? 나는 불행히도 나의 역할과 용도에 의심을 품었다. "도대체 어쩌자는 것일까?" 하고 스스로 물어보았다. 그 순간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무엇 하나 손에 잡히는 것이 없었다. 영웅이 되고 싶다고 해서 영웅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용기나 재주만으로 되는 일도 아니다. 퇴치할 뱀이 있어야 하고 괴물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어디서도 그런 것을 찾아볼 수 없었다. 
188p 

우리의 깊은 의지는 서로 떨어질 수 없이 얽힌 기도와 도피로 이루어져 있다.
???p


뮈세를 읽은 일이 있는 나는 "가장 절망적인 노래가 가장 아름다운 노래"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절망을 꼭 붙잡아서 '미'를 사로잡아 보려고 했다. 나는 재능이라는 말이 늘 의심스러웠다가 마침내는 완전히 싫어졌다. 만약 내게 재능이 있다면, 고민과 시련을 겪고 유혹을 물리침으로써 공적을 세우는 기쁨을 어디서 찾으란 말인가?
200
 
나는 선택되고 지명되었지만 재주가 없는 인간이다. 그러니 모든 성공이 나의 기나긴 인내와 불행으로부터 태어나리라. 나는 내게 아무런 특성이 없다고 다짐했다. 특성이라는 것은 도리어 사람을 옹졸하게 만드는 것이니까. 나는 오직 괴로움을 통해서 영광의 길을 걷겠다는 그 드높은 맹서에만 충실하려고 했다. 문제는 그 괴로움을 어디서 찾느냐는 것에 있었다. 그것이 유일한 문제였는데 해결될 것 같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비참하게 살 수 있는 희망을 박탈당했기 때문이다.
201

오랫동안 나는 내가 태어난 것처럼 어디서든지 아무렇게나 죽게 되는 것이 두려웠다. 희미한 출생의 반영처럼 희미하게 죽게 되는 것이 두려웠다. 그런데 나의 천직이 문제를 깨끗이 해결해 주었다. 칼싸움은 사라져 없어지지만 글은 남는다. 문학에 있어서는 증여자 스스로가 증여물로, 즉 순수한 사물로 변신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우연은 나를 사람으로 만들었지만 너그러움은 나를 책으로 만들 것이다. 나는 수다를 떠는 나의 의식을 활자화하고 삶의 소유 대신 불멸의 기록을 남기리라. 그리고 육체 대신 문체를, 시간이라는 연약한 나선 대신 영원을 얻으리라. 언어의 침전물로서 성령 앞에 나타나고 인류에게는 집념의 상징이 되리라. 요컨대 나 자신과도 다르고 남들과도 다르고, 삼라만상과도 다른 '타자'가 되리라.
207-208

남들이 나를 읽는다는 것은 내가 그들의 눈 속으로 뛰어든다는 말이다. 남들이 나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내가 보편적이면서도 독특한 언어로 변모해서 그 모든 사람들의 입속으로 들어간다는 말이다. 수백 만의 시선을 위해서 나 자신을 장래의 호기심의 대상으로 만들어 놓는다. 나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에게 나는 가장 깊숙한 불안을 준다. 그러나 내게 손을 대려고 하면 나는 살짝 사라져 버린다. 나는 아무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있는' 것이다. 나는 모든 곳에 '있다'. 인간의 기생충인 나는 나의 선심을 통해서 인간의 파먹고 인간으로 하여금 언제나 나의 부재를 되살리게 한다.
209-210

믿음이란 그것이 아무리 깊어도 완전무결할 수는 없는 법이다. 끊임없이 그것을 지탱해야 하고 적어도 그것이 허물어지지 않도록 애써야 한다.
223

내 잘못을 이렇듯 기꺼이 인정한다는 것은 내가 앞으로는 그런 잘못을 저지를 수 없으리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 보이는 일이다. 그러나 남이 그것을 믿어 줄 것인가? 나의 성실함과 나의 도량 넓은 고백은 오로지 나에게 불평을 품은 자의 비위를 거스를 뿐이다. 그는 내 속셈을 꿰뚫어 보고 내가 그를 이용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가 원망하는 것은 나, 살아 있는 나, 과거와 현재의 나, 그가 늘 알던 것과 똑같은 나다. 나는 내가 '방금 태어난 아이'라고 스스로 느끼는 기쁨을 위하여 그에게 생명 없는 허물을 벗어 준 것이다. (중략)
남들은 내가 매우 겸손한 줄 알지만 사실은 정반대다. 오늘 같으면 더 잘할 것이고 내일이면 더욱더 잘하리라고 생각하고 한 짓이다. 나아가 지긋한 작가들은 누가 그들의 처녀작을 극구 칭찬해 주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런 칭찬을 가장 싫어하는 것은 누구보다도 나라고 확신한다. 나의 가장 훌륭한 작품은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작품이다. 그리고 그다음으로는 가장 최근에 발표한 작품이지만, 나는 은근히 그것을 곧 싫어할 채비를 한다. 만일 비평가들이 지금 그것을 악평한다면 아마도 기분이 상할 것이다. 그러나 6개월 후에는 나도 그들과 비슷한 견해를 갖게 될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다. 그들이 아무리 그 작품을 빈약하고 하찮은 것으로 판단한다 하더라도 그 작품 이전에 쓴 모든 작품보다는 높이 평가해 달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시간적 순서만 존중해 준다면 내 작품을 송두리째 낮게 평가해도 이의가 없다. 오직 그 순서만이 내일은 더 잘하고 모레는 그보다도 더욱더 잘할 것이며 마침내 걸작에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유지해 주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제 꾀에 속아 넘어갈 위인은 아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반복할 따름이라는 것은 나도 잘 안다. 그리고 비교적 최근에 터득한 그런 인식이 지난날의 확신을 잠식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확신을 완전히 쓸어 내지는 못했다. (중략) 그들은 내가 전철을 밟는 현장을 자주 목격한다. 그러고는 나에게 그 점을 지적한다. 나도 그들의 말이 옳다고 느끼고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다행으로 생각한다. 어제까지는 맹목적이었지만 오늘은 더 이상 진보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점에서 진보했으니 말이다. (중략) 가령, 지금 소용이 될 만한 글을 2년 전에 한 장 썼던 일이 문득 생각난다. 그러면 그 원고를 찾아보지만 나타나지 않는다. 전화위복이다. 나는 자칫 나태한 생각에 빠져서 새 작품 속에 낡아 ㅃ진 글을 끼워 넣을 뻔했으니까 말이다.
256-257

교양은 아무것도 또 그 누구도 구출하지 못한다. 그것은 아무것도 정당화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산물이다. 인간은 그 속에 자기를 투사하고, 거기서 제 모습을 알아본다. 오직 이 비판적 거울만이 인간의 모습을 보여 준다. 그뿐 아니라 그 쓰러져 가는 낡은 대궐, 즉 나의 속임수는 나의 성격이기도 하다. 사라이란 신경병으 ㄹ떨어 버릴 수는 있지만 자기 자신이라는 고질병에서 치유될 수 없는 법이다. 아무리 닳고 지워지고 모욕당하고 따돌림당하고 묵살당한다 하더라도, 어린 시절의 온갖 특징은 50대 인간에게 그대로 남아 있다. 대개의 경우 그것들은 어둠 속에 납작 엎드려서 기회를 노리고 있다. 그리고 방심하기만 하면 당장 다시 고개를 들고 변장을 하고는 백일하에 뚫고 나온다. (중략)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채 죽는 기회를 놓쳤기 때문에, 때때로 남의 오해를 받으며 사는 것이 신나는 것이다.어린 시절의 그리셀다는 아직 죽지 않았다. 파르다양도 아직 내 안에 깃들어 있다. 스트로고프도 그렇다. 나는 오직 신에게 의존하고 있는 그들에게 오직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 당신들은 어찌된 심판인지 가늠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나로서는 갈피를 잡을 수 없다. 그래서 나는 가끔 '지는 자가 이기는 자'가 되는 놀이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모든 것이 백 갑절로 불어서 되돌아오기를 기대하면서 예전의 희망들을 짓밟는 데 열중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지경이다. 그렇다면 나는 필록테테스(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영웅. 헤라클레스가 준 화살을 오디세우스의 간사한 계략에 속아서 내어주고 만다. 그러나 그 후 활을 되찾고  트로이 왕자인 파리스를 사살한다.)와 다름없을 것이다. 우람하지만 악취를 풍기는 이 부상자는 제 활까지도 무조건 내주었다. 그러나 가슴속 한구석에서는 은근히 그 보상을 기대했음이 분명하다.
 (중략) 일찍이 나는 재능의 행복한 소유자라고 자처해 본 적이 없다. 나의 유일한 관심은 적수공권 무일푼으로, 노력과 믿음만으로 나 자신을 구하려는 것뿐이었다. 그러니 나의 순수한 선택으로 말미암아 내가 그 어느 누구의 위로 올라선 일은 결코 없었다. 나는 장비도 연장도 없이, 나 자신을 완전히 구하기 위하여 전심전력을 기울였다. 만약 내가 그 불가능한 구원을 소품 창고에라도 치워 놓는다면 대체 무엇이 남겠는가? 그것은 한 진정한 인간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로 이루어지며, 모든 사람들만큼의 가치가 있고 또 어느 누구보다도 잘나지 않은 한 진정한 인간이다.
270-272 -FIN-




'마음에 고이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Boardwalk Empire S04 E03-04  (0) 2014.01.05
The Master, 2012  (0) 2013.12.19
영롱한 목표  (0) 2012.01.24
Father and Daughte, 아버지와 딸 (2001)  (0) 2008.08.14
Såsom i en spegel, 거울을 통해 어렴풋이  (0) 2008.08.14